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에는 개인의 실천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따라붙는다.
가령 이런 것들.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 투쟁에는 "그래서 대안이 뭔데? 너는 전기 안 쓰냐?"라는 질문이,
제로웨이스트 운동에는 말은 좋다만 "근데 너는 플라스틱 안 쓰고 사냐?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내로남불'의 구호에 지쳐버린 사람들의 뾰족한 마음도 알겠고, 가끔 어깃장이 아니라 대안이 염려되는 진심이 느껴질 때도 있고, 정치적 구호에는 실천이 따라 붙어야만 말에 생명력이 생긴다. 그럼에도 대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너무 단순해서 상대방의 입을 닫게 하는 '근본' 없는 도발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연사, '플라스틱 프리'나 '제로 웨이스트'를 목놓아 외치지만,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테이블 위에만 플라스틱이 몇 개야, 당췌. 나는 화제의 책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든가, 『나는 쓰레기 없이 산다』처럼 명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저 노-오-력 할 뿐이다. 외려 역설적으로 자원이 줄어드는 시대에, 더 많은 물건이 필수품이 된 세대에게, 플라스틱은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플라스틱은 현대 생활의 물리적 기반 중 하나이며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유익하다. 우리는 태양열 패널을 원하고, 자전거 헬멧을 원하고, 계보기를 원하고, 방탄복을 원하고, 연료 효율적인 자동차와 비행기를 원하고, 플라스틱 포장재도 상당히 많이 원한다. 19세기 말에도 그랬듯이, 플라스틱은 자연 자원이 줄어드는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으로 기후변화를 겪게 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탄소 발자국을 점점 더 많이 고려하게 될 텐데, 가볍고 에너지 효율적인 플라스틱은 이점에서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플라스틱 사회』 302~303쪽
그래서 내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플라스틱은 중요하고 소중하다! 플라스틱 심장 박동기, 합성수지 소재로 만든 임플란트 치아, 단단하고 가벼운 자전거 헬멧, 얇고 질긴 치실 등 그 어떤 목재, 금속, 천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을 한 번 쓰고 버리는 일만은 저지르지 말자고. 플라스틱 프리 운동은 모든 플라스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5분 사용하고 500년 이상 썩지 않은 '일회용' 플라스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까 플라스틱 자체가 아니라, 플라스틱을 어떻게 대할지 우리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다.
일회용이 아닌 다회용 플라스틱의 경우 새로 채굴한 화석연료 없이 만드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이미 사용되다 버려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페트병을 가공해 축구선수 티셔츠를 만든 월드컵 혹은 폴라폴리스 자켓을 만든 파티고니아 사례가 알려져 있다. 둘째는 옥수수, 사탕수수, 대두, 콩 등 재생 가능한 식물로 만든 '바이오 플라스틱'이다. 사실 바이오 플라스틱은 요즘 아이템은 아니다. 애초에 플라스틱은 식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 옛날, 자동차의 왕이자 최초로 조립라인을 선보인 '헨리 포드'가 대두에 투자하면서 대부분의 자동차를 "기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 까닭이다. 애석하게도 너무 싸고 효율적인 화석연료가 등장해 싹도 안 난 식물성 원료를 몰아내고 말았다. 그러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꽃처럼 다시금 바이오 플라스틱이 소환되고 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에 대한 환경적 부담, 그리고 화석연료로 만든 플라스틱에서 나온다고 의심되는 유해물질 때문이다.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쓰이는 1만 가지 물질 중에 유해성 여부를 확인한 것은 단 11개뿐이다.
마르고토 발슈트룀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이러한 이유로 음식과 닿는 부엌용품은 최대한 도자기, 유리, 스테인리스, 나무 등의 자연소재를 이용해왔다. 도마도 마찬가지. 집에는 나무도마가 2개 있었다. 하나는 빵을 놓는 인테리어(?) 접시 도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진짜 도마 노릇을 하는 녀석. 전 룸메이트가 남긴 플라스틱 도마가 있었지만, 음식이 직접 닿는 거라 찜찜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태에 홀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짊어지고 온 나무 도마의 경우, 장마철에는 음지식물처럼 피어난 곰팡이를 제거해야 했고 때때로 올리브유로 고이 닦아줘야 했다. 역시 아름다움에는 커다란 대가가 따르는 것이었어. 나를 노동력으로 써 먹는구나!
나무 도마의 모습
그렇게 닦아주었는데 곰팡이가 서렸다니!
이렇게 나무도마는 쓸 때마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마른 행주로 꼼꼼하게 닦아줘야 한다. 채소가 자박자박 썰어진 도마를 들어 냄비에 직접 채소를 투하할 수도 없다. 한 손으로 들어서 핸들링 하기엔 나무 도마가 좀 무겁냐고. 무엇보다도 쓸 때마다 나무 도마의 물기를 제거해서 보관해야 했기에, 어느 새 나는 '가위손'이 되어 버렸다. 닦기가 귀찮아 왠만해서는 도마를 안 쓰고 가위로 먹거리를 싹둑싹둑 잘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다 사탕수수로 만들어진 바이오 플라스틱 도마를 선물 받았다. 공기 중에 천천히 물기를 말려도 곰팡이가 생기지도 않고, 한 손으로 거뜬히 도마를 들거나 구부려 냄비에 내용물을 바로 집어 넣을 수 있는 가벼운 플라스틱 도마라니. 오호라, 참 편리하도다. 수육처럼 뜨거운 음식물을 올려놓고 썰어도 식물성 원료로 만든 플라스틱이라 별로 염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본디 땅에서 자란 것은 땅으로 돌아가 썩는 법이다.
연근을 또박또박 자르자, 플라스틱의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통통 울린다.
4가지 크기의 도마를 세워놓을 수 있어 작은 부엌에도 거뜬하다.
(플라스틱 통에 담긴 연근은 썩어서 못 먹는 거임)
한 손으로 거뜬히 도마를 들어 냄비에 야채 투척!
통도마부터 시트도마까지 용도별, 크기별로 4개 도마 한 세트 구성.
그동안 가위로만 잘라썼던 김치도 도마 위에서 통통통.
지금의 과잉생산, 과잉소비를 그대로 둔 채 화석연료를 바이오 연료와 바이오 소재로 변경할 경우 노답이다. 여전히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브라질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굶주린 사람을 놔두고 더 좋은 연료와 더 좋은 소재를 위해 곡물이 사용되다니. 그렇지만 도마처럼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린 플라스틱'도 좋지 않을까. 가지도 가위로 잘라서 요리하던 내가 요즘 또박또박 정자체를 쓰듯, 도마에 원재료를 올리고 반듯하게 자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더 편리하다. 게다가 사탕수수라면 즙을 짜낸 다음 부산물이 많이 나오니 그걸 소재로 사용할 거고 말이다.
나는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삶에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우선 '쓰레기가 되는 삶'을 줄이고, 그 다음으로 플라스틱이 필요한 분야에 재활용 플라스틱과 바이오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하며 살고 싶다. 먹거리와 닿는 물건은 곡물로 만든 '바이오 플라스틱'을, 그리고 그 외의 생활용품은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생명을 얻은 물건들을 써야지. 내게는 좀더 '좋은' 플라스틱이 필요하다.
친환경 바이오 플라스틱 생활용품, 슈가랩
홈페이지 http://www.ecomasskorea.com/
쇼핑몰 http://ecomass.cafe24.com/
(슈가랩에서 지인을 통해 도마를 보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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