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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타이베이] 우리에게는 보행권이 있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11. 5.

난 미국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여행이든 유학이든 결혼 이주든, 하여튼 미국에 가 본 친구들이 미국에 가자마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아무래도 차를 구해야 할 것 같아"

아리조나(?)인가 뭔가 미국 골짝에 떨어진 한 친구는 인도도 없이 차도만 나 있는 길을 한 시간 걸어 도서관에 도착한 후, 인생 최초의 운전 면허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손주를 돌보기 위해 워싱턴 DC에 머물던 울아빠 친구는 "돈만 있으면 한국이 최고로 살기 좋다"며, (요런 말씀은 뭐시당가...) 그 이유로 차 타고 15분은 족히 가야만 나오는 슈퍼마켓을 들었다. 그 놈의 네비게이션까지 영어로 말해서 못 알아듣겠다고 분통을 터뜨리시며. 어디나 한 켠 짜리 작은 가게들이 촘촘히 자리잡고 있고, 언제나 눈요기 할 수 있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바글거리고, 웬만한 곳은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걸어서 닿을 수 있는 도시에 살아서 좋다. 걸어다니며 생활의 모든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도시는 언제나 연결되는 무선 인터넷만큼이나 중요하다. 인터넷이 전자 회로로 직조된 정신적 연결망이라면,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는 공간과 몸의 물리적 연결망이다.

물론 서울은 저 멀리 100미터 앞에서 누군가 길을 건널라 치면 차를 세우고 천천히 기다리는 스톡홀름처럼 젠틀한 도시는 아니다. 휠체어, 목발, 자전거, 유모차가 지나갈 수 없도록 인도의 턱 없는 부분에 '개구리' 주차한 차들도 많고, 느자구 없이 인도를 몽땅 점령한 차들도 종종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단전에서 솟아오르는 빡침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미안하다, 친구들아...) 어쨌든 서울은 하노이처럼 보행권을 씹어삼킨 오토바이의 천국도 아니고, 미국처럼 환경주의자마저도 자동차를 굴려야 생활이 되는 곳도 아니다. 

인도에 주차된 차들

이렇게 '안분지족'하던 찰나 약간은 우리와 닮은 아시아, 대만 타이페이를 갔다. 여행 가방에는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 들어있었다. 

인구수보다 오토바이 수가 더 많은데도 길을 막고 오토바이가 주차된 곳은 거의 없었다. 며칠 동안 타이페이를 걸어다녔지만 '개구리' 주차된 차는 딱 한 대 보았다. 차도와 인도가 턱으로 분리되지 않은 작은 골목길에는 보행자의 공간이 녹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타이페이는 걸어다닐 만한 도시였다. (녹색등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와 오토바이가 많긴 하지만) 그러다 거리에서 만난 보행권 표시. 

"보행자는 길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 Pedestrians Have Right of Way."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지 않은 큰 길 안 쪽의 골목에는 녹색으로 보행자 공간이 표시돼 있다. 

보행자에게는 길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

1996년 올림픽 기간 동안 200만 명 이상의 방문자가 애틀랜타로 몰려 들었고, 도시 인구는 사실상 50퍼센트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애틀랜타에서 천식으로 입원한 환자의 수는 무려 30퍼센트나 줄었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도심 주변에서 차량운행이 금지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걸어다닐 수 있는 도시 45쪽) 

같은 책에 따르면 파리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동차 의존도를 줄이기로 결정하고, 추후 20년에 걸쳐 매년 40킬로미터씩 버스 전용차로를 늘리고, 1,450개 지역에 도심전용 자전거 2만 대를 비치하며, 5만 5,000개의 주차장을 없애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안분지족은 무슨. 

나는 더 살기 좋고, 더 건강하고, 더 매력적인 도시를 원한다. 그래서 서울이 더욱 '걸어다니기 좋은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이 기꺼이 차와 이혼하고, 미세먼지 경보가 있는 날은 자가용 운행을 통제하고, 서울 사대문 안은 신촌 차 없는 거리처럼 허가 받은 영업용 차량과 버스, 택시만 다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간 중심의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건축가 얀 겔은 “인간의 삶과 도시의 매력에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역동적이고, 열려 있으며, 그리고 생기 넘치는 길가다.”라고 했다. 나는 걷다가 내 취향의 장소를 발견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 공간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여행하고 싶다. 역동적이고, 열려 있으며, 생기 넘치는 길가의 공기에 취해 발걸음이 사뿐사뿐 움직일 때, 여행은 가장 여행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