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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ble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린 연남부르스리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5. 4.


연남동 식당에서 망원동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길, 봄바람이 일렁거렸다. 영원히 끝이 없을 것 같은 초여름 밤의 공기가 아닌, 앳되고 여린 봄밤의 기운이 금방 사라질듯 아스라한 느낌이었다. 그 밤, 퇴근 후의 한갓진 저녁 시간을 당신들과 보내고 돌아오면서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렸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자이자 작가 이자크 디네센이 쓴 동화 말이다. 나는 그 책을 <<자연을 담은 소박한 밥상>>, <<자연을 담은 사계절 밥상>>, <<자연을 담은 엄마의 밥상>> 등 레시피 위주의 요리책과 함께 부엌 선반에 올려두었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전, 스파게티의 면이 삶아지기 전, 그 틈새의 시간에 가스레인지 앞에서 <<바베트의 만찬>>의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그럴 때면 꼬박꼬박 집밥을 차려내는 부엌데기의 고달픔이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을 돌보는 '카모메 식당'을 감싼 평화가 찾아들었다. 특별할 것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하루가 어여뻐지는 순간들.    

<<바베트의 만찬>> 이야기는 꽤나 심플하다. 특별할 것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덴마크 시골 마을에 사는 순결하고 금욕적인 노자매, 마르티네와 필리파에게 어느 날 바베트라는 낯선 프랑스 여인이 찾아온다. 파리의 미식가들을 사로잡던 (귀족과 왕족을 위한) 요리사였지만 혁명의 와중에 오갈 데 없어진 바베트는 자매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녀는 조용히 그들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렇게 세 여인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은 12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보낸다.  

어느 날 바베트는 만 프랑짜리 복권에 당첨되고, 자매의 아버지였던 죽은 목사의 100번째 생일 만찬을 자신의 방식으로 차리게 해달라고 청한다. 시골 마을과 아버지, 그리고 노자매가 살아온 삶의 결을 거스를 것 같은 바베트의 정통 프랑스식 만찬은 그녀의 간청으로 겨우 합의된다. 노자매가 느낌 부담감은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에 뚝 떨어져 제대로 주문해야 하는 난감한 기분이었을 거다.  

바베트는 인디언 부족장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거나 과시하듯 버리는 '포클래치' 의례처럼 만찬을 준비한다. 그녀는 식재료를 사기 위해 파리를 다녀오는 등, 단 한 번의 만찬을 위해 복권 당첨금을 아낌 없이 써버린다.           

바베트의 만찬에 초대된 마을 사람들과 노자매는 어떨떨해하지만, 곧 음식을 맛보고는 따뜻하고 감미로운 세계에 빠져든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의 축복이 그들을 휩싼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66~67쪽


나는 잘 차린 음식이란 진시황의 밥상에 올라간 진귀한 식재료나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게 하는 요리솜씨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바베트의 만찬'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순간의 음식. 물론 진귀하거나 싱싱한 식재료를 쓰거나 너무 먹고 싶어서 먼 길을 나서게 할 정도도 좋다. 하지만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관계를 녹아내리게 하고 그 순간을 공유한 사람들을 소중하고 고맙게 여기게  하는 밥상이 가장 좋다. 무엇보다 선물처럼 주어진 생명이 일용할 양식으로 순환되는 의미를 되새기는 밥상이 좋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여봐란듯 올리는 음식 사진을 생각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자국민들의 음식 소비 패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요즘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이 영국 내 음식물 쓰레기량을 급격히 증가시켰다고 한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인 18세~34세의 젊은 세대가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음식 사진을 올리기 위해 과도하게 음식을 시키다 보니 남기는 음식이 늘어났다고. <<바베트의 만찬>>에 나오는 밥상과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맛집 순례'의 사진이 다른 의미를 지닌 이유다.  

관련 기사 http://www.thekpm.com/news/articleView.html?idxno=8009


여성환경연대의 전 사무처장이었던 보은 샘이 마르쉐@를 꾸려오다, 올해 단체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그녀는 여성환경연대와 마르쉐@의 활동가들을 '연남 부르스리'에 초대해 대접했다. 그곳의 부엌은 당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공수해온 살아있는 수산물로 가득했고 요리 방송에서 나오듯 불이 활활 타올랐고 실제로 쉐프가 올리브 TV에 등장한 사람이었다. 갈치를 고명처럼 올린 파스타는 재미있었고, 산낙지가 꿈틀대는 세비체는 페루와 한국의 합작품이었고, 대구살을 발라낸 그라탕은 감자 그랑탕처럼 부드러웠다. 입에 넣은 음식들은 한결같이 펄떡이고 생생하고 탱탱해서, 도로 수족관에 넣으면 살아날 듯했다. 

하지만 맛 때문에 '바베트의 만찬'이 떠오른 것은 아니다. 동료이자 선배, 그리고 '언니'의 독립, 떠나가면서 만찬을 대접하는 따뜻함, 식탁을 둘러싼 우리의 정겨움이 봄바람처럼 살랑거려서 였다. 단체를 떠나간 많은 선배들이 든든하게 함께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 자리만은 아니고 종종 이런 기분 느꼈지만 가장 최근의 일이라...) 그러니까, 나는 만찬도, 포클래치도, 봄바람도 좋다. 포틀래치는 캐나다 인디언 치누크(Chinook) 부족말로 '건네주다' '베풀다'는 뜻이다. 







대구 그라탕

산낙지 세비체

해물스튜

갈치 스파게티


연남 부르스리 정보 

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id=35407837&entry=plt&query=%EC%97%B0%EB%82%A8%EB%B6%80%EB%A5%B4%EC%8A%A4%EB%A6%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