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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life/etc.

[한국일보] 죽음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0. 26.

한국일보 삶과 문화 2016년 10월 17일 칼럼

왕가리 마타이가 죽었던 날, 언니가 죽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왕가리 마타이는 아프리카에 4,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나이로비의 우후루 공원을 지켜냈다. 환경 운동을 하는 나였지만 대한민국 인구수만큼의 나무를 희생해서라도 우주에 단 한 명뿐이었던 내 자매를 살리고 싶었다.


언니는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된다며 가볍게 검사를 받으러 갔다 하루아침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날 루시드 폴의 노래를 떠올렸던가. ‘사람들은 즐겁다,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 언니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 하릴없이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돌봐야 할지 몰랐다. 그저 살려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그리고 신께 빌었다. 가끔 새벽에 깨면 눈물을 흘린다. 죽음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처음 접하는 죽음의 현실을 몰랐고 그랬기에 그 잔인한 과정에 지쳐갔다고.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은 것은 한참 후였다. 외과 의사인 그는 환자들과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나쁜’ 죽음에 이르는 의료시스템을 비판하며 한 연구를 인용한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그 정보를 요구할 때조차도 정확한 예후를 밝히기를 꺼리고, 효과가 없을 거라고 믿는 치료법을 제공했다고 인정한 경우가 40%에 이른다. 많은 경우 환자에게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치료받을 의지가 있는가는 고사하고, 수술 후 예상되는 결과와 가능성, 당장 결정하거나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 구체적인 치료과정, 항암 치료의 영향마저도 진실하게 말해지지 않는다. 극도의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환자와 가족은 병원의 수순에 삶을 맡기고 치료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다. 병원의 조립라인에 몸을 누이는 순간 모든 것은 빠르게 자동으로 돌아간다. 의료지식이 있거나 평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온 극소수만이 여러 가지 고려 끝에 자유의지로 치료를 선택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눈부신 의료기술과 의료 관계자의 헌신으로 생명을 구한다. 그러나 운이 좋지 않은 많은 이들은 바로 그 때문에 자아와 일상을 송두리째 잃은 채 환자의 정체성만으로 생을 마감한다. 육체의 구멍마다 튜브 줄을 꽂고서 ‘사랑해’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아니 죽는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이 죽는다. 언니는 항암 치료를 받은 후 자기 힘으로 먹고 돌아다닐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잃었다. 그 상태가 되면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 인생 정리는 고사하고, 육체의 광폭한 휘둘림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커튼 한 장으로 가려진 의료용 침대와 텔레비전과 환자복, 그리고 고통스럽고 끝이 없는 연명 치료뿐이다. 언니는 치료를 거부하며 집에 가자고 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원할 때 일어나고 자고, 자기 옷을 입고, 가족들이 보호자용 의자가 아니라 온돌방에서 자기를 바랐다. 때로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 한 사람의 존엄을 지켜준다. 그러나 호스피스 서비스가 미천했기에 방문 간호사 고용과 위기 상황 대처, 환자 이송까지 모든 책임을 가족이 져야 했다.


고 백남기 농부의 주치의께서 “가족들이 체외투석치료 등에 반대해 최선의 치료가 이뤄지지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병원 시스템에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언니는 스스로 연명 치료를 거부했고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죽은 자가 건네는 최선의 위로였다. 그러나 여전히 연명 치료만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나를 절망케 한다. 생명 연장 기술은 미치도록 발전하는데 내가 나인 채로 죽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의료 복지 시스템은 멀기만 하다. 젊은이들을 지켜줄 울타리가 되어주자며 그날 서울의 거리에 섰던 정직한 농부의 삶을 연명 치료 운운하며 모욕하지 마시길. 죽음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글_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