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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day

생일날 아침, 찬란한 유언장 쓰기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10. 27.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거 같지 않던 나른한 하루, 딱 이 정도면 더도 덜도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 겨울 휴가, 그리고 따뜻한 방콕의 길거리였다. 어디선가 차가 나타나 길을 건너던 나를 박았고 말도 밥도 낯선 태국의 병원에서 수술을 2번 받고 휠체어를 타고 귀국했다. 여행할 때 거리에서 먹던 태국 음식은 그렇게나 맛만 좋더만, 병원 밥 맛없다는 만국 공통의 진실에 따라 입맛도 없고 한국말로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는 병상에서 나는 유언장 생각을 골똘하게 했드랬다.


사진: 모모


호스피스 병동의 고여있는 시간 속에서 인생을 차분히 정리할 거라는 기대도 막역한 거였다. 영양분과 미네랄과 진통제를 엄마의 탯줄처럼 연결된 링겔을 통해 피 속으로 공급받는 건강 상태로는, 태아가 엄마 뱃 속에서 어떤 원초적 의지 외에 다른 생각을 품지 않듯, 죽어가는 환자도 어떤 원초적 의지 만으로 하루 하루를 겨우 버텨냈다.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란 암 세포만 추적하는 최첨단 항암 치료를 1,000만원을 내서라도 받을 것인지, 보험이 안 되는 값비싼 치료를 만에 하나 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데 감히 거부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거였다. 그 고민도 원초적 의지로 버티는 환자보다 환자 가족들의 몫이었다. 유언장은 호사였고, 유언장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죽음은 호상이었다. 


언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기 전 암 병동의 병실에서 지냈다. 우리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둘 다 옷을 홀딱 벗고 풍욕을 하고 병원 뒷산을 산책하고 성경책을 읽고 어릴 적 방을 같이 쓸 때 FM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를 듣고 언니 첫사랑이 뭐하고 살까, 하고 궁금해했다. 언니는 암 환자는 장기 기증도 못 한다면서 각막 기증이라도 하고 싶어했다. 한 사람의 각막은 각각 하나씩 두 명의 시각 장애인에게 기증되어 두 명의 눈을 뜨게 한다. 심청이는 효녀라서 아버지 눈을 뜨게 해 드렸지만 인당수에 몸에 던지지 않고서도 두 명의 눈을 밝혀줄 수 있다면야. 매장보다는 화장이 좋겠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살아 생전 할 수 있는 말들을 담아 비디오도 남겼다. 하지만 각막은 기증되지 않았고, 화장이 아니라 매장되었고, 오직 비디오만 남아 사랑한다고 말했다. 언니 뜻대로 된 것은 링겔을 주렁주렁 달고 병원 은행에서 계좌이체를 하고 자기 명의의 통장을 폐기한 거였는데, 글씨를 쓸 힘도 없어서 서명 이외의 글씨는 부모가 써야 했다. 


언니에게 고맙다. 이기적이어서 미안하지만, 언니가 내게 남긴 찬란한 유산은 어떻게 죽어갈 것이냐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은행에 가지 않아야지, 나는 어디까지 치료를 받고 받지 않을지 아프기 전에 항상심을 지닌 마음으로 생각해둬야지, 병원이 아니라 꼭 내가 살던 집에서 죽어야지, 내가 누리던 일상을 누릴 수 없는 건강 상태라면 스콧 니어링처럼 독하게 곡기를 끊어야지, 내 몸의 생기가 살아보려는 원초적 의지를 버티기에도 버겨워지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미리 작심하고 연습해야지, 그래야 내가 나인 채로 살았듯 나인 채로 죽을 수 있다.


차 사고에서 회복하여 일상으로 돌아오니 세세연년 살 사람처럼 유언장 따위는 잊고 살았다. 생일날 아침 파락호가 갑자기 개과천선한 것처럼 나도 유언장을 쓰고 나인 채로 살고 나인 채로 죽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게 죽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시각 장애인 두 명의 눈도 뜨게 해주고 싶었던 것.


'다양한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 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 모임'에서 자기 뜻대로 죽을 수 있도록 <찬란한 유언장>이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민사 소송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두로' 말했던 내용도 참고사항이 되는데 유언만은 예외라고 한다. 반드시 법률적 형식을 갖춘 유언장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암만 구두나 다른 형식으로 자기 뜻을 전달했어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가장 간단한 '자필증서'가 유언장으로 인정받기 위한 법률적 형식은 1) 유언자가 전문을 자서할 것, 2) 연월일은 자서할 것 (연월일이 없는 유언서는 무효임), 3) 주소를 자서할 것 (꼭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아니더라도 생활의 근거가 되는 곳이면 됨), 4) 성명을 자서할 것 (성명의 자서 대신 자서를 도장 등으로 날인해도 무효), 5) 날인할 것 (인장으로 할 필요 없고 무인도 상관없음) 이다. 


20100526_찬란한유언장_자료집.pdf

     

자필로 써야 효력이 있지만, 유언장 쓰기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간단한 내용을 적어본다.

(유언장 형식은 위의 PDF 파일을 참고하세요. 깨알같이 자세히 나와있음. 짝짝짝)


사진: 모모


1. 내 명의로 되어있는 망원동 집은 내가 가진 돈과 부모님께 대출받은 돈으로 구입한 부동산으로, 월 100만원 씩 8년 간 부모님께 갚기로 계약했다. 내가 이 돈을 다 갚고 죽을 경우에는 '진짜' 내 집이 되므로, 이 집은 내 친구 최00에게 유증한다. 만약 내가 이 돈을 부모님께 다 갚기 전에 죽으면 얼마를 갚았던 간에, 내 명의의 집에서 최00가 계속 살기를 원한다면 집을 최00에게 유증하고, 대신 최00은 내가 죽을 당시 집 시세의 20%를 내 부모님께 드린다. 만약 내가 돈을 다 갚기 전에 죽고 그 이후에 집을 처분한다면 부모님께서는 내가 그 때까지 갚은 금액 모두를 최00에게 돌려주시고 집 판매 금액의 30%도 역시 최00에게 주신다. 최00은 내가 죽은 후 10년 동안 매해 2차례 엄마, 아빠 생신 때마다 우리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거나, 2박 3일 이상의 여행을 보내드린다. 또한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날마다 길냥이들에게 밥과 물을 제공한다. (사료값은 니가 알아서 하시라 ㅋㅋ) 혹시 내가 죽을 때 노00이 싱글이라면 나의 사후 5년 간 노00을 챙겨주고 그 5년 간 노00이 여행을 가거나 일 때문에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녀의 고양이를 맡는다.     


2. 부동산 이외 죽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의 모든 잔고는 나의 장례비용으로 사용한 후 내가 일했던 (사)여성환경연대에 유증한다. 활동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월급은 어떻게들 알아서 잘 맹그시고, 4대강 공사, 핵발전소, 밀양 송전탑처럼 긴급한 환경 현안이 생길 때 그 활동에 사용해주시라. 


3. 내게 속했던 물건 모두, 가재도구와 사진, 내 살림살이 모두를 최00과 노00에게 유증한다. 특히 화분은 노00이 전적으로 알아서 처리한다.


4. '주택에너지효율화사업'으로 서울시로부터 8년간 6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 돈은 최00이 전적으로 갚는다.


5. 나의 재산관계나 가족관계에 변화가 있었음에도 미처 유언장을 수정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다음을 따른다.

내가 사망하기 전 부모님께 재산을 상속받은 경우에는 30%는 최00에게, 나머지는 모두 (아직 못 정했지만) 00000 단체로 유증한다.  (부모님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단체를 찾아봐야 쓰겄다. 다행히 진보적이시라 어버이연합, 자유총연맹 같은 곳 싫어라 하신다.)


6. 유언자는 유언자의 사망시 기증할 수 있는 장기를 모두 기증한다. (각막 포함)

주민등록증에 장기 기증 스티커 붙여놓았는데 주민증 잃어버리고 새로 발급받으면서 사라졌다! 다시 스티커 붙여놔야겠다!!


7. 장례는 간소하고 즐겁게, 내가 살던 집에서 치러주시라. 부의금은 받지 말고 꼭 내고 싶다고 하면 모아서 우리 부모님께 기증한다. 장례 절차는 최00과 노00에게 미리 말해두었으며 전적으로 그들이 내 뜻에 맞게 장례를 거행한다. 그들이 내가 살던 집에서 친환경 고구마와 공정무역 커피와 차, 유기농 빵, 주먹밥으로 조문객들을 대접한다. 젓가락과 텀블러는 장례식장에 오시는 분들께서 각자 챙겨오시고, 일회용품, 화환 등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노00은 네가 좋아하는 노래가 바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니 장례식 당일 우리 집에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시라. 살아 생전의 내 사진과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웃고 줄거워하시라. 우리 부모님은 이런 장례식이 불편하실테니 특별히 최00과 노00이 챙겨주시라. 친척들도 불편해 하실테니 부모님께서 외가, 친가 친척들을 직접 모시고 좋은 곳에서 밥 한 번 대접해주세요. 장례식은 저랑 각별히 친했던 사람들이 편하게 저를 기억할 수 있는 분위기로 진행해주시고 일 년에 한 번 보거나 친척, 인척 관계로 엮인 사람들이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신경써주세요.     


8. 오동나무 관은 필요없어요. 내 육신을 처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들이지 마세요. 화장도 에너지가 많이 들기는 하지만, 새가 쪼아먹는 조장이나 바람에 썩도록 냅두는 풍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이 화장하고 최00이 내가 좋아했던 장소, 나랑 같이 걸었던 곳, 우리가 좋아한 한강과 선유도 공원을 포함한 장소를 선정하여 알아서 조금씩 뿌려주세요. 그리고 엄마 아빠나보다 오래 사시면 (만약 내가 더 오래살면 최00은) 내 고향 전라도 땅에 내가 어릴  적 우리 집 앞마당에서 해마다 맛있는 무화과를 먹었던, 선인장처럼 생긴 무화과 나무를 10그루 쯤 심어주세요. 그 무화과를 생각하면 아빠랑 엄마랑 가족들이 여름날 무화과 따던 날들이 생각나 행복합니다.